송시열(宋時烈, 1607년 12월 30일(음력 11월 12일)~ 1689년 7월 24일(음력 6월 8일)은 조선의 문신 겸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당색은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로 활동하였다. 생전에는 서인의 수장으로 정치 활동을 하면서 효종의 북벌, 예송논쟁, 숙종의 환국 등 여러 정쟁에 관여하였고, 1689년 기사환국시기에 사형을 당해 정읍에서 죽는다. 영조 이후 노론이 집권한 이후에는 문묘와 종묘에 배향되는 등 조선멸망때까지 성리학자로서 높이 평가받았다. 자는 영보(英甫), 아명은 송성뢰(宋聖賚)·송성래(宋聖來), 호는 우암(尤庵)·우재(尤齋)·교산노부(橋山老夫)·남간노수(南澗老叟)·화양동주(華陽洞主)·화양부자(華陽夫子),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효종, 현종 두 국왕의 왕자 시절 가르친 스승이었으며 대로(大老),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 등으로 존칭 되었다. 1633년(인조 10) 경릉참봉으로 출사하여 대군사부, 진선, 장령, 찬선, 세자사부, 이조판서, 의정부좌의정, 우의정,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 행판중추부사,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에 이르렀다. 예송 관련 논쟁 당시 송준길, 김수항과 함께 서인의 영수였으며, 기사환국으로 덕원부, 거제도 등의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제주도에 유배됐으나 그를 평소 존경하던 정조가 그를 성인(聖人)으로 추숭하여 송자, 송부자(宋夫子)로 격상되고, 국가의 스승으로 추대되었다. 서인 성리학파의 종주로 송시열 역시 수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여 이단하, 윤증, 민정중, 민유중, 김기하, 권상하, 이여, 정호 등을 길러냈다. 윤선거, 윤선도, 윤휴 등과 친구가 되어 교류하였으나 남인들에 의해 발생한 예송논쟁 이후에는 척을 지는 관계가 되었다. 사후 송시열의 파벌인 노론이 정국을 완전히 장악한 이후에는 정조 때는 국가적 차원에서 국가의 스승인 송자로 격상되었고 송시열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으로 간행하는 등 조선 성리학자 중 가장 높게 평가받았다. 그러나 조선 멸망 이후 성리학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서 조선말기를 지배했던 송시열의 사상에 대해서 많은 비판이 이루워져 조선 멸망의 사상적 배경으로 격하되었으며, 조선왕조실록의 번역 이후로는 송시열의 정치인으로서의 잘못된 행보 등이 드러나면서 이쪽으로도 평가가 갈리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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