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기 간 : 2003.07.22 ~ 2003.09.21 ㅇ 내 용 : 백제의 척도제는 도량형 기본이 되는 것으로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웅진·사비전기에는 25㎝ 내외의 중국 남북조시대의 척(尺)이, 사비후기가 되면 부여 쌍북리 자처럼 29.5㎝ 내외의 당척(唐尺)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25㎝ 내외의 척은 능산리절터 출토의 백제금동대향로와 창왕명석조사리감, 목간 등에 적용되었다. 또한 부여 외리 출토 무늬벽돌은 그 한변의 길이가 28∼29.8㎝ 내외로 부여 쌍북리 출토 자의 1자 추정치인 29.1㎝와 거의 같다. 이는 무늬벽돌이 1자 크기로 만들어졌음을 보여주는 예로 7세기 전반에는 이미 공식적으로 당척이 수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문무왕 5년(665)에 가서야 비로소 당척이 국가의 새로운 기준척이 되는 신라 보다 앞서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백제의 당척 수용이 620년대에 시작된 중국에서의 당척제 시행시점과 거이 차이없이 진행된 것은 중국의 새로운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이는 백제인들의 정치감각이 개방적·국제적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백제의 율령제(律令制)에 적용된 실태를 보여준다 하겠다. 양제(量制) 또한 척도제와 맥을 같이 하는데, 한성기 말∼웅진기 초로 편년되는 솥모양토기[釜形土器]는 서진(西晉)의 양기(量器)와 닮아 있고, 웅진기 유물인 손잡이바리[把手附鉢]는 남조의 양제가 적용되었으며, 부여 쌍북리에서 발견된 목제 사각용기와 부여 화지산 출토 석제 용기는 당(唐)의 양제와 닮아 있다. 특히 이 목제 사각용기와 석제 용기는 각각 1말과 5되 용적의 양기로 당시의 양제가 세분화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부여 쌍북리 출토 목제 사각용기는 한 변의 길이가 당척 1자(29.5∼29.7cm) 길이와 거의 같은 29.3cm, 29.6cm여서 척도(尺度)와 양기(量器)를 겸하고 있다. 이는 백제의 도량형제가 매우 높은 수준이었음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형제(衡制)는 추나, '일근'새김거푸집[一斤銘鎔范], 각종 화폐, 무령왕릉 출토 은팔찌 등에서 그 일면을 찾아 볼 수 있다. 백제의 추는 1근이나 반근 등 절대무게를 측정하는 용도보다는 대상물의 무게를 비교하기 위한 상대무게를 측정하기 위해 많이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일근'새김거푸집은 용적으로 계산된 무게로 볼 때, 한대(漢代) 무게가 적용되었다면 구리[銅], 웅진기 이후 백제와 중국 양(梁)과의 밀접한 관계를 고려하면 은이 주조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유적의 연대를 생각하면 구리보다는 은을 주조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무게의 적용 단위도 파악이 가능한데, 공주 무령왕릉 출토 '다리작'새김은팔찌['多利作'銘銀釧]는 팔찌에 새겨진 230주이(二百 主耳)의 주(主)가 중국 무게단위인 수(銖)의 백제식 표기법이어서 그 무게가 230수임을 알려 주고 있다. 이처럼 거푸집이나, 화폐 등 무게와 관련된 유물은 당시 백제의 생산과 교류의 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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